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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절망 딛고 아프리카 희망 전도사 된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2012.06.05 10:34

충북여세연 조회 수:6486 추천:20

첫딸로 태어난 죄 아닌 죄로 아버지에게 내동댕이쳐졌고, 그때 입은 상처로 평생 134㎝ 척추장애를 안게 됐다. 술에 찌들어 살던 아버지는 소녀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살을 했고, 정신질환을 앓던 어머니는 틈만 나면 “넌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어”란 말을 되뇌었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육체적·정신적 학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와 한의원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월급 3만원으로 버텼다.

절망만 계속될 것 같았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아프리카 오지에 희망을 일구는 인간 드라마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김해영(47·사진) 국제사회복지사를 5월 29일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했다.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사회적 책임감”으로 글로 풀어 쓴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서울문화사)가 서점가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6월 1일부터는 밀알복지재단의 아프리카 지역 총책임자로 근무를 시작하고, 2년여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엔 석사학위를 이미 취득한 미국 컬럼비아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계획이라고 눈을 반짝였다. 마치 초반의 가혹했던 인생살이를 고스란히 보상 받고 있는 것 같다.

“‘인간’으로 살고 싶어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희망의 출발점은 ‘앎’에 대한 끝없는 욕구였다. 자신에게 몰아친 불행과 부조리의 이유를 규명하고 싶어 동서양 철학을 독학하며 고입·대입 검정고시를 치러냈다. 편물명장(1985년 세계장애인기능경기대회 기계편물 부문 세계 1위)이 돼 순탄한 직장생활도 했지만 ‘2%’ 부족한 무엇인가에 대한 갈망은 그를 아프리카 남부 보츠와나의 ‘굿 호프 직업학교’로 이끌었다. 처음 4년은 여기서 편물 교사로 자원봉사를 하다 폐교 위기가 닥치자 팔을 걷어붙이고 스스로 교장이 돼 학교를 살려냈다. 그리고 좀 더 넓고 깊게 봉사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택하고 ‘야간 중학교 3개월 중퇴’란 학력으론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명문 컬럼비아대 대학원의 입학 허가를 받아내 순조롭게 석사과정을 마친 후 현재 남부아시아 부탄 지역사회 개발 프로젝트 팀장, 한남직업전문학교(현 서울시 중부기술교육원) 명예교수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역동적인 삶의 여정이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장애인도, 여성도 아닌 한 인간으로 대우받고 살고 싶었다”는 단순하지만 존엄한 소망이다.

“초등학교 6년 중 3년을 바깥에서 잠을 청했다고 하면 어떻게 살았는지 아시겠죠? 엄마는 ‘네가 장애인이 돼서 집안에 불행한 일이 생기는 거야’ 하면서 나보고 쓸데없이 태어났다고 타박하셨죠.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린 마음에 ‘이 세상은 더 이상 살아보지 않아도 돼’라고까지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내가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이런 원망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게 됐죠. 한의원에서 일하며 약재 상자의 흰색 한자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결국 식모살이하며 천자문을 익혔죠. 이로 인해 알게 된 사서오경이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어요. 사서오경에 있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나 정직하고 바른 데다가 내가 어렸을 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얘기와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직업전문학교에서 편물기술을 배우고 14시간 공장에서 일하다 퇴근해도 책을 늘 옆에 두고 읽었어요. 이미 난리와 몰상식, 비합리와 비상식을 몸으로 겪어 알고 있었기에 머리가 아닌 몸으로 책이 이해됐죠. 다른 사람을 성실히 대하고 어려운 이를 도와줘야 한다는 사회적 예의도 익혔어요. 이때부터 적으나마 고아원에 후원금을 보내는 등 나눔을 실행하게 됐죠. 십대 때 책에서 얻은 교훈을 차근차근 실행한 것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인간으로서 살 길에 대한 생각이 그때 다 놓여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책은 정말 무서운 거예요(웃음).”

책과 함께 그의 새로운 자아 형성을 도운 것은 바로 아프리카였다. 우연히 보게 된 선교단체 회보 한 귀퉁이에 실린 아프리카 보츠와나 직업학교에서 자원봉사 할 편물교사를 구한다는 두 줄의 광고. 어머니도 건강해지고 동생들도 학교에 진학하는 등 생활이 안정돼 가는데도 까닭 없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허한 일이 잦아지면서 그는 문득 이 광고를 떠올렸고 1990년 초 20대 중반 나이에 미련 없이 아프리카로 향했다. 그리고 청춘을 보낸 그곳에서 직업훈련 교육자로, 선교사로 성공을 일궈냈다.

“보츠와나 사람들이 날 사람으로 만들어줬죠.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예쁘다’는 말을 들어본 것도 그곳에서예요(웃음). 그들에겐 내 작은 키도, 장애도 문제가 아니었어요. 사실 거기서 민주주의의 원칙을 배우기도 했어요.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추장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 전체가 모여 토론을 벌이고 이견을 좁혀가며 만장일치를 유도해 결정했어요.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아야 실행하기에 합의 과정은 훨씬 길어도 후에 이를 뒤집거나 다시 반대할 수 없게 되죠. 마을학교 세우는 것부터 나무 심는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커뮤니티를 만들어 논의하며 진행해가는 끈기를 요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래서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게 되죠.”

정든 아프리카를 떠나면서 그가 정확히 깨달은 것은 아프리카의 모든 문제는 ‘무지함’에서 비롯되기에 해결의 열쇠는 ‘교육’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열서너 살 여자아이가 임신한 것을 알았어요. 그 애에게 아이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하더군요. 너무 무지하고 어려서 일어난 일이기에 그 아이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나무랄 수도 없음을 절감했어요. 교육되어지지 않은 인성, 열악한 사회 환경, 그들 스스로도 원치 않는 전쟁과 가난, 과연 누굴 탓할까요? 14년의 시간을 보내며 이걸 이해하고 아프리카를 떠났어요.”

그는 초기의 시행착오를 통해 아프리카를 대하는 제1 원칙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현지인을 탓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활하면서 그들의 9가지 단점에는 자연스레 눈이 감기고 1가지 장점만 부각시켜 보게 되더라고요(웃음). 그들도 인간이기에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이 있지 않겠어요? 그들의 단점을 탓하지 않고 장점을 인정해주고 격려해주는 것,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죠.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편견은 크게 두 가지죠. 동물의 왕국과, 기아·빈곤·전쟁·에이즈의 대륙. 그래서 이것 하나만은 반드시 기억해주기 바라요. 거기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산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100년 후에도 아프리카 사람들이 여전히 지금처럼 열악하게 살 것이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어요? 척박한 중에도 옥수수, 오렌지를 키우며 꿈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이 있는 걸요.”

국제적인 사회복지사로 기금 모금과 네트워킹을 위해 그는 평균 3개월 단위로 동서양을 누비고 다닌다. 신기하게도 자원봉사를 하면서 신체적 아픔이 씻은 듯이 없어지면서 일에 적합한 체질을 갖추게 됐다. 그래서 그는 농담 반 진담 반 말하곤 한다. “아프리카 생활하면서 허리 고쳐 나오고, 미국 유학 생활하면서 다리 고쳐 나왔다”고.

“나도 이해가 안 돼 조심스러운 얘기이긴 하지만 어려서부터 아프던 허리가 아프리카에서 한창 생활하던 삼십대 초반에 갑자기 나았어요. 17세 때부터 허리에 복대를 하고 살았는데 그걸 풀어버릴 정도가 된 거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복대를 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빼고 하다 보니 누가 아무리 좋은 데를 가자 해도 복대를 안 하고 있어 결국 못 가는 그런 꿈까지 꿀 정도로 복대 강박증에 시달렸어요. 더구나 허리 통증이 사라진 그 1996년은 폐교 위기에서 학생들의 간청으로 내가 교장이 돼 학교를 살려내면서 학생 수가 30명에서 60명으로 늘어난 데다 정부 지원도 받게 돼 행정적 일이 굉장히 많고 격무에 시달리던 때였어요.

미국 유학 중이던 2006년에는 1인치 짧았던 오른쪽 다리가 다소 길어져 걸을 때의 통증이 사라지게 됐어요. 공부를 다 마치고 귀국하니 엄마가 나를 뉘어놓고 막 만져보더니 ‘미국에서 사람들이 널 엎어놓고 막 밟았니?’라고 물으실 정도로 몸의 균형이 잡혔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이렇게 몸이 건강해졌는데 또 다른 소원을 하나님께 기도하면 난 참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정말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 외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답니다.”

“134㎝ 키? 10㎝ 구두로 높이면 돼죠”

아프리카 대륙에선 케냐를 중심으로 북부 쪽엔 외국의 교육기관이나 단체가 비교적 많이 들어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봉사했던 보츠와나나 마다가스카르, 소말리아, 시에라리온 같은 남부 아프리카엔 상대적으로 기관들이 많지 않아 열악하다. 밀알복지재단에서의 그의 프로젝트는 한 방송국(SBS)의 후원을 받기에 좀 더 안정된 재원 속에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청사진을 꿈꿀 수 있게 됐다.

“대륙 전체를 코디네이트하는 것, 이것이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입니다. 유치원서부터 직업학교에 이르기까지 나라별 상황에 맞게 설치 매뉴얼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죠. 이 일을 통해 아프리카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주역이 되어 일을 진행할 수 있게 접근할 계획입니다. 프로그램 개발이 주 전공이라 자신감도 느낍니다. 나 한 사람 가서 2년여 일하는 것이 바닷물에 물방울 하나 보태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바닷물 역시 이런 물방울들이 모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새로운 용기가 솟죠. 장대한 일을 몇 년 후 하는 것보다 지금 당장 발을 내딛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여기에 더해, 이렇게 부족한 나를 보고 우리 사회 엘리트들이 좀 움직여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죠. 건강한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나와 희망을 심는 일에 함께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화제가 됐던 그의 10㎝ 통굽 구두가 불편하지 않으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걸을 때) 다리가 뜨면 통증이 오니 굽이 높아야 하는 것은 필수라며 “134㎝가 작다고 하면 10㎝ 구두를 사서 신으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 생각했다”는 명쾌한 대답을 했다.

그가 배운 진정한 사회복지사의 의미는 “어제까지 몰랐던 사람들이 만나 대화를 하고 생각을 나누며 서로의 처지를 알게 되고 이런 교감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사람”이란다. 그와 헤어지면서 저 멀리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양극화와 생활고에 찌든 여기에도 서로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복지사’의 열정을 가진 이들이 더욱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실해졌다.

이은경 / 여성신문 편집위원 (pleun@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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