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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여전히 쉬쉬하는 스포츠계 수많은 ‘도가니’ 사건

2011.10.25 16:21

충북여세연 조회 수:30207 추천:35

“혼나는 게 무서워 응할 수밖에 없었어요”
성추행 지도자 경기장 복귀 ‘인권사각지대’

스포츠계 성폭력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공공연한 비밀이다. 2007년 본지가 처음 스포츠계 남성 감독들의 성범죄 실태를 고발한 것을 시작으로 2008년 ‘스포츠 성폭력’ 실상을 폭로한 TV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방영되고서야 금기시됐던 감독들의 여성 선수 성폭행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당시 방송에서 어린 여자 선수들이 합숙소에서 자는 동안 감독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서로서로 손을 묶고 잤고, 한 여고 팀에서는 합숙이나 전지훈련 때 1년간 감독을 ‘모실’ 한 명을 정했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나오면서 작금의 ‘도가니 현상’ 이상으로 사회가 들끓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변한 것은 없어 보인다. 당시엔 불에 달궈진 것처럼 뜨거워졌지만 이내 식어버렸다. ‘도가니’처럼 스포츠계 성폭력 사건을 다룬 영화가 등장해야 성폭력이 뿌리 뽑힐 수 있을까.

“(감독이) 방으로 불러요. 팀에서 마사지 잘하는 애가 누군지 아니까 지목해요. 안 간다고 하면 혼나니까 올라가요. 올라가면 자기 발가락을 마사지하라고 하는데 제가 인상 쓰면 또 혼나요. 자기는 누워서 책 보고 우리는 왼쪽, 오른쪽, 허리에 한 명씩 붙어서 마사지를 하는 거예요. 마사지가 소홀해진다 싶으면 ‘오늘은 올나이트야. 각오해’라고 말하는데 진짜 그렇게 해요.”

국가인권위원회가 면담한 여자 축구선수 박모(23)씨의 목소리다. 박씨는 초등학교 때 축구를 시작해 지금은 실업팀을 목표로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성추행은 비단 박씨만의 일이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국내 대학 운동선수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643명 중 16.2%(104명)가 한 가지 유형 이상의 성적 피해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일부 유명 선수들도 성추행을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지난 7월 은퇴한 김영옥 전 국민은행 농구선수도 은퇴 직후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자신이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왜곡된 FA제도(자유계약제도)의 모순과 소속팀 감독의 비인격적 대우와 음주 강요 때문”이라고 밝혀 파장을 일으켰다. 스타 선수였던 그도 “시즌 중에도 2~3일 정도 경기가 없을 때면 나이대별로, 그룹별로 불려 나가 술을 마셔야 했다”며 “몸이 안 좋고 피곤해도 감독님 부름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실제 전혜숙 민주당 의원이 대한체육회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 2008년부터 올해 8월까지 신고·접수된 폭력·인권침해 건수는 2009년 74건에서 2010년 496건으로 급격히 증가했으며 올해도 364건으로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성폭력 관련 신고·상담 건수는 오히려 증가하는 주세다. 2009년 4건, 2010년 16건으로 증가했고, 올해에는 벌써 26건으로 이미 지난해의 신고 건수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신고·상담 건수에 비해 징계를 받는 가해자 수는 오히려 줄고 있으며 처벌 수위도 미미하다.

안형환 한나라당 의원이 대한체육회에서 제출 받은 국내 28개 종목의 운동협회의 최근 3년간 선수 폭력(성폭력) 징계 자료에 따르면 2008년 13건, 2009년 26건, 2010년 20건, 2011년 7월 현재 7건 등 총 66건으로 집계됐다. 징계 내용을 살펴보면 제명은 4건, 자격정지는 26건에 불과했으며 나머지는 가벼운 경고나 합의에 그쳤다.

그동안 정부도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대대적인 실태 조사를 벌이고 스포츠 인권보호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고 스포츠 인권 전문 인력을 양성해 교육과 홍보를 펼쳤다. 문제는 성폭력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만 접근했다는 데 있다. 관련 전문가들은 “엄격한 위계질서, 군대 같은 생활방식, 지도자에게 잘못 보이면 엘리트 선수로 성장하기 어려운 체육계의 구조와 제명당해도 계속 지도자 생활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면서 “폭력과 인권침해를 체육계만의 특수성으로 이해하는 선입견도 전환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먼저 지도자뿐만 아니라 선수 스스로도 성폭력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야 한다. 지난해 체육전공 대학생 660명과 엘리트 선수 출신 12명을 대상으로 심층조사한 김인형 신라대 체육학부 교수가 발표한 논문을 보면 “슬쩍 지나가면서 만지고 포옹하면서 만지고 그랬는데, 그렇다고 심하게 그런 건 아니었다”는 한 여자 운동선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선수들이 성교육을 받지 못해 지도자의 성적인 행동에 대한 인식과 판단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성희롱 예방 교육이 더 강화돼야 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합숙 중심의 훈련 시스템도 개선돼야 한다. 합숙은 학생 선수들이 사회와 동떨어져 운동부 특유의 위계적인 문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다. 현재 초·중학교는 합숙이 폐지됐지만 실상은 여전히 많은 학교에서 합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사에 따르면 실제 성폭력 사건이 합숙소에서 가장 많이 발생했다. 외부와 차단돼 있는 곳에서 성폭력 위험 가능성은 커질 수밖에 없는 것. 학교 운동부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담을 허물어야 한다.

김두현 한국체육대 교수는 지난 8월 학생 운동선수 권리보호 토론회에서 “스포츠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여성 선수들이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고용노동부와 연계해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른 노동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법규와 관계 기관의 제반 근절 대책의 지속적인 점검, 대한체육회 등 산하기관이 아닌 시민단체 등 독립적인 전문가가 피해자 지원체계를 운영하는 방안 등을 제안했다.

무엇보다 성폭력 가해자가 다시 경기장에 발을 딛는 일을 막아야 한다.

2007년 소속팀 농구 선수를 성폭행하려 한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WKBL에서 영구 제명 당한 전 프로농구 감독인 박명수(45)씨는 현재 중국에서 실업농구팀 지도자로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팀 성적만 좋다면 협회에서 제명돼도 지도자로 복직할 수 있는 것.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7월 ‘스포츠 인권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관련 부처와 체육협회에 채택을 권고했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성폭력 예방을 위해 지도자는 훈련 때 선수와 신체적 접촉을 하지 않아야 하며, 불가피한 경우에도 최소화해야 한다. 성적인 농담, 신체나 외모에 대한 언급도 피해야 한다.

스포츠계 성폭력은 ‘도가니’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정부와 관련 단체, 사법부의 미온적 태도가 가해자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로 이어졌고, 가해자는 복직해 또 학생들을 가르치고 피해자는 숨어야 했다. 스포츠 인권 가이드라인을 시작으로 체육계 자정 기능을 살려 현재진행형인 스포츠계 ‘도가니’ 사건들을 근절시켜야 한다.



1156호 [사회] (2011-10-21)
이하나 / 여성신문 기자 (lhn21@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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