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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페미니즘은 내 안에 있는 리더십과 재능을 꽃피우는 것”

2011.05.30 17:22

충북여세연 조회 수:19694 추천:46

여성운동의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
“페미니즘은 내 안에 있는 리더십과 재능을 꽃피우는 것”
평등 구조의 ‘원형’ 리더십 강조...“폭력은 위계적 성역할에서 온다”

▲ 5월 24일 이화 창립 125주년 기념 초청 토론회 참석차 이화여대를 방문, 동료 페미니스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글로리아 스타이넘. (왼쪽부터) 행사를 주관한 장필화 아시아여성학센터 소장(이화리더십개발원장), 스타이넘의 오랜 지기인 정현경 유니온신학대 교수, 스타이넘, 역시 토론회 패널로 참석한 에이미 리처드. 에이미 리처드는 미국의 차세대 페미니스트를 대표하는 작가로 영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을 위해 ‘제3의 물결재단’을 공동 설립하기도 했다.
“내 삶에서 단 1초도 페미니스트로 살아온 것을 후회한 적 없다. 만약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았더라면 마조히스트(자기 학대자)가 됐을 테니까.”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여성운동의 왕언니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5월 24일 이화 창립 125주년 기념 초청 토론회장에서 만났다. 그는 SBS 주최 ‘서울디지털포럼’을 비롯해 제주포럼, 이프토피아 DMZ 평화기행 등 5월 말부터 6월 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여성들과 활발한 교류가 계획돼 있었다. 이번 이화 토론회의 주제는 ‘사회변혁을 위한 여성 리더십과 미디어 운동’. 1968년 ‘뉴욕 매거진’의 창간 작업을 도우며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972년 페미니스트 매체의 롤 모델이라 할 수 있는 ‘미즈(Ms.)’를 공동 창간해 15년간 편집장으로 지내온 그의 이력에 이보다 더 알맞은 주제는 없으리라.
“과거엔 어떤 방식으로 리더십을 사용했는지 연구해야겠지만 그 전형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다. 늘 새로운 형태를 고민하고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사람들이 흔히 ‘리더십’이라 하면 저 위쪽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리더십은 바로 여기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듣기보다는 일상적인 삶과 일에서 리더십을 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이제까지 여성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리더십의 전형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여성들이 많은 분야에 진출하면서 기존의 것을 모방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듣지만, 특히 정치·미디어 분야에선 여성들만의 방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것은 그전의 피라미드식 위계질서가 아닌 원형의 평등 리더십이다.”

미디어 언어, 정치성 지워야 성평등해진다

그는 실례로 최근 이집트 혁명을 주도한 보통 여성들의 사례를 들며 그들을 ‘미디어 영웅’이라 지칭하는 것을 주저치 않았다. 그 첫 시작은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 있었던 한 아이의 엄마인 젊은 여성이 당시 상황을 유튜브로 전 세계에 전파하면서부터다.
“우리는 항상 언어로부터 리더십의 영향을 받는다. 미디어의 영향을 말할 때 꼭 짚고 싶은 것이 바로 언어의 정치성이다. 대학 졸업 후 2년간 인도에서 공부할 때의 얘기다. 당시 (서구 중심의 제국주의 관점에서 생긴) ‘극동지역’이란 표현을 썼더니 사람들이 ‘극동’이라 함은 어디서부터 멀고 또 어디서부터 가까운지 묻더라. 언어엔 특히 여성과 남성이 대비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언어의 편향된 정치성을 지우기 위해선 언어부터 성평등을 꼭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언어적 정의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의외로 꼬마의 어법을 사례로 들었다. 어린 시절 우리도 흔히 말하곤 하던 “이건 정말 공평하지 않아. 네가 뭔데 그렇게 말해?”가 바로 그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미디어 리더십은 연대를 통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가면서 윈-윈 전략을 구사하는 리더십이다. 그는 실례로 보스턴에 있는 한 대학에서 인기 교수를 정치적 이유로 해임하려 했을 때 당시 학생을 비롯한 학교 구성원들이 보여준 연대의 힘을 들었다. 처음엔 이 해임 통보를 받은 교수가 다른 교수들과 연대해 시위를 벌였지만 별 반응이 없다가 교내 통신 서비스, 식당 서비스 근로자들이 시위에 참가하자 사태가 달라졌다.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불편을 느끼게 되니 비로소 반응하기 시작했던 것. 이 연대 전략은 특히 여성운동에서 유용하다.

“여러 그룹이 각각 모여 조직화할 때 각 그룹의 목표를 반영해 각자 이득을 차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CBS에서 실제 일어난 일인데, 여성 중역들과 비서 그룹이 연대해 상생의 효과를 만들어냈다. 비서는 회사 내 많은 일을 알고 있다 보니 승진이나 명퇴 등에 있어 여성 중역들에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도왔고, 여성 중역들은 비서들이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진학할 수 있도록 조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비즈니스 스쿨에 응시한 비서 절반 이상이 합격의 기쁨을 안았고, 회사로서도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는 성과를 얻게 됐다.
좀 더 멀리 가보자. 이런 윈-윈을 위한 연대 전략은 한국과 같은 분단국에 평화를 가져오는 데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실제로 아일랜드와 라이베리아 같은 분쟁 지역에선 여성들이 평화회담에 적극 참가하는 등 다리 역할을 해냄으로써 분쟁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가 하루빨리 정착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특히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저출산 현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부분에서 그는 여성이 아닌 ‘부모’를 강조했다. 출산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평등하게 관련된 것이고, 따라서 양육을 포함한 일·가정의 양립문제를 남녀 모두의 역할로 받아들여야 아이들 세대가 출산은 여성 몫이란 편향된 통념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출산 위기, 이제 부모의 욕구에 조직이 맞춰라

“아직까지도 직장에선 부모들이 변하기를 바라지 직장이 이 부모들의 사정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출산 파업을 멈추기 위해선 이제 직장이 부모에 맞추는 것이 정답이다.”
그에게 출산의 문제는 이런 삶의 문제를 넘어서는 또 하나의 여성 억압적 상징이다. 때문에 자유로운 여성주의자나 여성운동가가 되기 위해선 계급이나 민족적 위계질서에 반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의 몸이 재생산 도구로 이용되다 보니, 백인 여성으로 대변되는 상위 계층에선 순수 혈통을 봐야 한다는 제약과 강박관념이 암암리에 작용했고, 하위 계층 여성들은 보다 많은 자녀를 낳도록 착취당해온 것이다. 결국 계층에 상관없이 여성의 몸은 출산과 관련해 불이익을 겪어왔다.”
그런데, 미국에도, 그의 시대에도, 현재 한국의 여성운동계가 치열히 고민 중인 세대 간의 격차가 있을까. 그는 “단순히 시간적 개념으로 페미니스트를 구분지을 수는 없다”며 “우리는 나이와 관계없이 얼마든지 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영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행복해지고 활력을 얻는다. 영 페미니스트들과 일할 때 항상 가르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배우기도 하면서 일에 있어 서로 균형을 맞추어 나간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세대보다는 지금 세대에 페미니스트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다소 불편한 점이 있다면 서로 상황을 이해하거나 대화를 할 때 참조 자료가 다른 경우가 있어 조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 나와 함께 일하는 젊은 세대는 최소한 딸이나 손녀뻘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이에 대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는 덧붙여 모두가 동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부조리에 대해 반박했다. “세대 간 차이와 갈등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문제”며 “모두가 만장일치를 이루지 못한다면 문제가 된다고 불안해하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이는 마치 미국에서 모든 여성이 ‘난 페미니스트’라 말하지 못한다면 그동안의 여성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러운 논리”라고 지적했다.
한 세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후배 페미니스트들에게 큰 그늘이 돼주고 있는 이 대모는 여성을 넘어 여성 안에 내재할 수 있는 ‘영성’에 큰 관심을 쏟고 있다. 그래서 아메리칸인디언, 히말라야, 아프리카 등지의 원류 문화인 원주민 문화를 계속 연구하고 있다. 그러면서 새삼 감탄하는 것은 이들 문화권에선 남녀의 역할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스웨덴의 한 저명 학자의 말을 인용해 “모든 폭력의 근원은 성역할 구분에 있다”며 범죄는 속성상 항상 ‘남성성’의 문제라고 덧붙인다.
“유럽의 이주민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 사이에 성범죄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여기서 바로 성범죄는 인간의 본성이 아닌 권력의 문제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모든 생명체에 신성이 있다” 믿어 최근 관심사는 ‘영성’

특히 이들 원주민 문화권에선 여성이 출산권 행사를 중시하면서 성인의 수가 늘 아동의 수를 초과하도록 신경을 썼는데, 이는 그만큼 아동을 잘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지금 현실에서 보듯이 이 반대의 경우에 아동폭력이 많이 일어나지 않는가.
인상적인 것은 이들 원주민 문화권에선 우리 모두가 곧 자연이라고 보기에 자연과 인간 그리고 성별을 구분하는 언어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이를 다시 종교적 영성과 관련지어 말하자면 우리 여성들은 모든 생명체에 신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 알 것이다. 때문에 여성으로부터, 또 자연으로부터 신의 개념을 분리했던 것은 남성들이 여성과 자연을 분리시키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 여성들은 종교의 정치화에 대해 잘 이해하고 이를 반대해야 할 것이다.”
“평등이 곧 이상”이라고 생각해오다 3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우리에게 정말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우리 안의 재능을 발휘케 해준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글로리아 스타이넘. 그와 장시간 나눈 공감은 “세계의 평화와 희망을 일구어가는 거목”인 그의 면모를 여성운동가로 국한하는 것은 너무나 협소한 생각이라는 한 여성 인사의 말을 체감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페미니즘이야말로 그만큼 독특하고 깊이 있는 휴머니즘이란 것에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팔순이 가까운 나이에 고동색 티셔츠와 진 바지를 대담하게 매치한 멋스러움. 그리고 자연스레 몸 전체에서 배어나오는 섬세한 배려와 겸손함의 소프트 파워. 나도 저런 페미니스트로 평생을 살 수 있다면 단 1초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절로 들었다.



▲ “내 자매인 작가와 언론인 여러분, 인류의 반인 여성의 존재를 현실에 보이게 해준 여러분의 노력에 감사를 표합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한국 유일의 여성 정론지 ‘여성신문’에 자매애를 담은 메시지를 전했다.

이은경/ 여성신문 편집위원
1136호 [특집/기획] (201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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